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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고단할 때 찾아가는 곳···티파니에서 아침을

기사승인 21-09-1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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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 영화
 
 
삶이 고단할 때,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울적할 때 어느 곳에 가면 나도 모르게 위안이 되고 편안해지기도 한다. 그곳이 사람마다 같지는 않다. 아니, 그곳이 꼭 장소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이어도 좋다. 왠지 그 사람만 만나면 마음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 있다. 젊었을 때 나는 사는 게 힘들고 괴롭다고 느껴질 때 곧잘 오드리 헵번 영화를 찾곤 했다.

오드리 헵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청순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공주로 나온 <로마의 휴일>일 것이다. 그러나 헵번 특유의 세련된 패션 감각과 철없어 보이면서도 귀여운 매력이 영화 내내 가득 넘쳐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나는 보는 내내 영화 속으로 뛰어들어 그녀가 상처 입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히 들었다. 

이 영화는 『냉혈(In Cold Blood)』로 유명한 트루먼 커포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1961년에 만들어졌으니 금년으로 환갑을 맞은 셈이다. 원작과 달리 시대적 배경을 1943년에서 1960년대 초로 옮기고, 마릴린 먼로를 주연으로 하려다가(커포티가 소설을 쓰면서도 먼로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했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으로 바꾸는 바람에 주인공 할리의 성격도 헵번에 맞춰 많이 변형시켰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 변형은 크게 성공한 셈이라 할 것이다.  

이른 아침, 커다란 노란 택시가 뉴욕 5번가 아직 문 열지 않은 티파니 보석상 앞에 멈춰 서고 검정 롱 드레스에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긴 실크 장갑 그리고 커다란 진주 목걸이 등으로 한껏 치장을 한 한 젊은 여인이 내린다. 얼굴을 반 이상 가린 짙은 선글라스를 낀 이 여인은 쇼 윈도우 앞에 가서 손에든 봉투에서 크루아상을 꺼내 한 입 뜯어 물고 테이크아웃 잔에 담긴 커피를 마신다. 쇼 윈도우 안의 보석들을 무심히 바라보는 이 여인의 눈빛이 행복하다 싶을 정도로 매우 평온해 보인다(누구는 이 장면을 ‘보석이 보석을 바라본다.’고 묘사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여자가 바로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며 부유한 남자들을 상대로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천진난만함을 무기로 생활비를 우려내는 할리 골라이틀리다(그녀의 이름 'Go-lightly'는 그녀가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언제나 떠날 사람’임을 암시한다). 할리는 또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화려한 신분상승을 꿈꾸기도 한다. 할리의 아파트 바로 윗층에 폴 바잭이라는 가난한 젊은 작가가 이사 오면서 이야기가 엮이는데, 잠시 전화를 빌려 쓰기 위하여 할리의 방에 들어간 폴은 발랄하면서도 보호가 꼭 필요해 보이기도 하는 할리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할리는 처음 만난 폴에게 자기가 키우는 고양의 이름이 아직 없는데 나중에 멋진 집을 갖게 되면 그때 고양이의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기분이 다운되면(red) 항상 티파니를 찾아간다고 말하는데, 폴이 우울하다(blue)라는 표현이 맞지 않냐고 하니까 red는 blue보다 더 처량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할리는 한밤중에 폴의 침대에 스스럼없이 뛰어 들어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냥 잠이 드는가 하면 한밤중에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부드러운 허스키로 ‘Moon River’를 불러 센티멘털한 감성을 건드리는 등 점점 폴의 마음을 빼앗는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든 거리낄 것 없이 하다가도 자신의 과거사에 관련된 것이 나오면 콧잔등을 긁으며 화제를 돌려버리곤 하는 할리에게 어떤 영혼의 상처가 있음을 알아챈 폴은 꼭 그 원인을 찾아 치유해줘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낀다. 따지고 보면 폴 역시 5년 동안 변변한 작품 하나 내놓지 못하고 부잣집 사모님한테서 용돈이나 타 쓰는 처지이고 보니 할리와 특별히 다를 게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던 중 수의사이자 농장을 경영하는 닥터 골라이틀리가 텍사스에서 찾아오면서 할리의 우울함의 근원이 밝혀진다. 할리는 본명이 ‘룰루메이’이고 14살 때 농장에서 우유와 칠면조 알을 훔치려다 들켜 어쩔 수 없이 홀아비인 농장주 골라이틀리와 결혼을 하였다가 몰래 도망쳤다는 것이다. 닥터 골라이틀리는 할리가 끔찍이 사랑하는 동생 프레드가 곧 군에서 제대를 하니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하나, 한없이 순수하면서도 이미 자유를 맛보았고 이 도시의 더 없이 세속적인 분위기 속에서 헤매고 있는 할리는 뉴욕을 떠날 수가 없다. 버스 터미널까지는 따라 나왔으나 할리는 닥터 골라이틀리에게 “야생동물에게 정 주지 마세요. 그럴수록 강해져서 언젠가는 더 높은 나무로 가거나 하늘로 날아가 버려요.”라고 말한다. 할리는 오래전 이미 무효화된 결혼이라고 말하지만 진실로 할리를 아끼는 듯한 늙은 남편을 그냥 떠나보내며 많은 눈물을 흘린다. 이런 할리가 왠지 밉지는 않고 그냥 안타깝기만 하다. 

자신이 할리를 사랑함을 확인하게 된 폴은 스폰서인 유부녀 2E에게 관계를 끊자고 선언한다. 그녀는 폴을 달래며 1,000달러의 수표에 서명을 하나 폴은 양복 상의 하나만 걸쳐 입고 나와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이제 소설도 열심히 쓰려고 한다. 폴이 할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나 좀 더 적극적으로 부자와의 결혼 작전을 펴기 시작한 할리는 “나는 당신의 소유물이 될 수 없어요.”라고 버틴다. 그 동안 남자들이 모두 쥐들처럼 자신을 갉아먹으려고만 해서 폴 역시 그의 진심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늘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는 할리, 그러나 정작 이름 없는 고양이처럼 삶이라는 길에서 벗어나 있기만 했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울적할 때 위안을 찾기 위하여 티파니를 찾아가는 것뿐…. 

우여곡절 끝에 할리는 파티에서 만난 남미의 미남 부호 호세에게서 결혼 약속까지 받아낸다. 그러던 어느 날 할리는 마약 조직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연행되고, 폴의 노력으로 보석으로 곧 풀려난다. 그러나 할리는 바로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를 타겠다고 공항으로 향한다. 폴은 택시 안에서 호세가 마약범죄에 연루된 할리와는 결혼 못하겠다고 보내온 쪽지를 읽어준다. 그래도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를 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할리를 만류하며 자신과 미래를 함께 하자고 종용하나 할리는 계속 브라질로 가겠다고 우기며 고양이까지 택시 밖 비오는 거리로 내던진다. 이때 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를 내뱉으며 전에 티파니에서 이니셜을 새기는 서비스를 받아 간직했던 반지를 던져주고 택시에서 내려 떠나간다.
“당신은 누군가가 당신을 가두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그러면서 당신은 이미 스스로 만든 우리에 갇힌 거야. …… 이대로 도망쳐도 당신에게 되돌아올 뿐이야.”
폴이 떠나간 후 이 말에 깨우침이 생긴 할리는 깊이 후회하며 택시에서 내려 폴을 뒤쫓아가고 폴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양이를 찾아 헤맨다. 비에 젖은 고양이는 다름 아닌 할리 자신이기에….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니 별 부담 없이 지방시 스타일로 세련되게 치장한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과 잘 다듬어진 매너 좋은 훈남 조지 페퍼드가 벌이는 사랑놀이를 2시간 가까이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어떤 의미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폴이 그 동안 참고 참았던 사랑의 고백을 하면서 할리에게 한 이 말이 영화 끝나고도 계속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속한 채 살아가지. 그게 행복해지기 위한 유일한 기회이니까.”

할리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지만 가끔 던지는 말 속엔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어딘가에 크게 속박되어 있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다. 폴은 가난하고 최근에는 발표한 작품 하나 없는 장래가 불투명한 말뿐인 작가지만 더 깊은 상처를 입을까봐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고 “아무도 날 우리에 가두지 못해요.”라며 모든 관계를 거부하는 듯한 할리, 무모할 만큼 순간을 위해 살면서도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먼지처럼 가볍게 세상을 떠도는, 그래서 결코 삶의 공허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이 여인을 어떻게 해서든지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진다. 
여기서 이 영화는 과연 ‘혼자임’이 자유스러운 것인가, 사람들이 맺는 모든 관계는 속박인가, 사랑은 그 관계를 아름답게 치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던진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마지막에 답을 주는데 그 답에 적극 공감이 간다(전에 이 영화를 볼 때는 놓쳤던 디테일인데, 이번에는 할리가 라스트 신에서 비에 젖은 고양이를 찾은 다음 폴은 포옹할 때 할리의 왼손 약지에 폴이 던져준 반지가 끼어 있었음을 보았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 도서관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또 다른 추억에 젖어들게 해주는 것이었다.
할리는 이렇게 말한다. 
“울적할 때면 그냥 택시를 타고 티파니에 가요. 그럼 금방 기분이 좋아져요. 그곳엔 조용함과 고고함이 있죠. 거기선 나쁜 일은 생기지 않아요.”
할리는 티파니에만 가면 우울함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찾을 곳이 꼭 필요하다. 이 글 첫머리에 젊었을 때 나는 영화로 오드리 헵번을 만나 힐링을 받았다고 했는데, 장소로 말한다면 나에게도 티파니 같은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서고에 가면 내 키의 두 배나 되는 높이의 서가에 빽빽이 꽂혀 있는 장서들이 수호천사처럼 나를 반겨주고, 그들이 풍기는 오래된 종이 냄새는 한없는 안도감을 주어 내 마음을 달래주곤 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뽑아들어 책장을 넘기면서 외로움도 극복할 수 있었고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평화를 찾아 마음도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요즘엔 모든 게 다 디지털화되어 도서관엘 가도 옛 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참 아쉽다. 아침 신문을 보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에 마음이 좀 상했는데 오늘은 DVD로 오드리 헵번 영화나 한 편 더 보고 위안을 삼아야 할 모양이다.  

추호경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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