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호경 변호사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인 척하는 것을 흔히들 ‘피해자 코스프레’라고 부른다. ‘코스프레’란 말이 만화나 게임 등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모방하여 그들과 같은 분장을 하며 흉내내는 놀이를 뜻하는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의 일본식 줄임말이어서 사용을 권장할 만한 단어는 아닌데 이미 대중문화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는 것 같다.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까지 들고 나오지 않더라도 피해자는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이를 이용하려는 행태가 바로 피해자 코스프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일부러 울음을 터뜨려 부모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것과 같이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둠으로써 유아다운 특권을 얻기 위함이라 하겠다.

과거 은막의 여왕이었으나 현재는 혼자 쓸쓸히 사는 여배우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고 신고가 들어왔는데 수사 결과 세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자작극인 경우도 있었고, 문 닫게 된 한 유명 명품점의 거액 외상대금 미납자인 어느 아이돌 스타에게 비난이 쏠리자 그 아이돌은 외상값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난해 오빠가 자살한 일과 어머니가 말기암으로 위중하다는 등 가정사를 밝히는데 이 역시 동정심을 얻으려는 전형적인 피해자 코스프레다. 대형 독직 사건에 휘말린 거물 정치인이 기자들에게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끼니를 잇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과 학생운동 시 공안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과거사를 꺼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검사로 근무하던 때 나는 수많은 사건을 수사했었지만 스스로 자기가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심지어 살인 사건의 피의자들도 거의 대부분 자기처럼 순한 사람이 참다 참다 못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됐으면 그놈(또는 그년)이 얼마나 못됐는지 알 만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피해자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댄다. 교행 길에 차량이 서로 충돌한 교통사고의 경우 거의 100 퍼센트 상대방 과실이라고만 주장하고, 서로 맞싸운 폭행 사건에서도 자기는 일방적으로 맞기만 했고 주먹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했다고 우겨댄다. 모 대기업 회장은 사업상 특혜를 받기 위해 먼저 나서서 뇌물을 줘놓고도 나중에 발각된 뒤에는 그 정치인에게 협박당하여 갈취당한 것처럼 호소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피해자인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해자 코스프레의 밑바탕을 들여다보면 이를 하는 사람이나 이를 바라보는 사람이나 ‘약자는 선(善)하고 강자는 악(惡)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맹목적인 것이다. 물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구호하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 함은 인륜에 맞는 것이지만, 이성보다 감성이 너무 앞서다 보면 가치판단에 혼란이 온다.

동료 변호사의 ‘성공사례’를 하나 보자. 그의 의뢰인 A는 27억 원 상당의 자사주를 횡령한 것으로 기소되었다. A는 고졸 학력이지만 회계에 밝아 경영주가 눈여겨보았다가 CFO를 맡겼고, 주식거래에 손대어 나름 잔재미를 보아오다가 막 상장한 자사주를 잠시 이용하고는 바로 채워 놓곤 했었는데, 그게 자꾸만 커져 결국 27억 원까지 되고 펑크가 나게 되었다고 한다. 경영주는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실제로 회사에 갚은 건 3억 원 정도뿐이어서(그것도 일부는 퇴직금을 받지 않는 것으로 정산했다고 함) 별다른 정상참작사유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변호사는 최후변론에서 고졸에 사회적응도 잘 못하던 찌질이를 잘 돌봐줘 CFO까지 시켜 놓은 경영주를 배신한 이런 피고인을 변호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참담하다고 전제한 다음, 그렇지만 이렇게 아무런 전과 없이 착하게만 살아온 피고인을 돈에 눈이 멀게 하고 회사의 주식까지 빼돌리게 만든 이 시대의 황금만능주의 풍조가 이 사건의 진정한 주범일지 모른다고 자본주의의 병폐를 한껏 성토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집도 없이 쫓겨나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갑상선기능저하증으로 삶의 의욕이 전혀 없는 그의 처와 왜 아빠가 집에 안 오시냐고 울먹이며 묻는 여섯 살짜리 딸을 봐서라도 피고인에게 꼭 한 번만 갱생의 길을 열어달라고 읍소했다고 한다.

결국 2주일 후 A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석방됐는데, 피해자 코스프레가 먹혀 들어간 셈이다(뒷이야기이지만 동료 변호사는 외상으로 이 사건 변호를 맡았는데 아직까지 변호사 보수를 한 푼도 못 받고 있다고 한다). 피해자나 사회적 약자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정으로서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의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경우를 보자. 좀 오래 전이긴 한데, 그 시절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던 한 작가가 진보적이라는 일간지에 기고한 글을 읽고 깜작 놀란 일이 있다. 논지는 자기가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 남편하고 사는데, 두 명의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1명씩의 아이까지 3명의 자식이 각각 성(姓)이 달라 남들의 놀림감이 되고 있다며, 세상에 이런 악법이 어디 있냐고 개탄하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 여성에 대하여 억압적이고 편견에 가득 찬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적극적으로 이를 헤쳐 나가자고 외치는 그 작가의 용기에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내왔던 나로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물론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아이들의 성이 각각이 된 것은 법이 잘못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글의 필자가 성이 다른 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인 것이다.

또 법을 바꾸어 아이들의 성을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것은, 놀림을 받지 않으려고 실제로는 자기 아버지 아닌 사람을 아버지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가 ‘조센징’ 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일본식 성으로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 내 생각으로는 세 아이가 각각 성이 달라도, 즉 자기 어머니가 세 번 결혼했어도 그것이 무슨 하자(瑕疵)나 되는 것처럼 보는 편견, 그런 사회적 인식을 불식시키는 것이 진정으로 놀림감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그렇게 이끌어가는 궁극적인 방도가 있음에도 눈가림 식 미봉책만 하는 것으로는 우리 사회가 개혁되는 데에는 한계가가 있을 수밖에 없다(다만, 2005. 3. 31. 민법 제781조의 개정으로 자(子)의 성과 본을 변경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이에 대한 논란은 하지 않겠음). 물론 이 문제에 대하여는 나는 남자이고 또 내가 당해 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건 나라이건 자신이 피해자이고 희생자라고만 생각해서는 문제 해결에 적극성을 가질 수 없고 진정한 개혁의 주체가 되기 어려운 것만은 분명하다.

또 우리는 곧잘 자신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피해자임을 자처한다. 한 어린이가 친모와 계부의 학대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극적인 보도를 접했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바로 피해자가 되어 인면수심의 친모와 계부를 비난하고 나아가 우리나라 아동복지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물론 피해자에 동조하여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가해자는 아니었나 하는 반성의 마음가짐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학대받은 어린이가 영양실조에 걸려 수척해진 모습을 본 이웃 어른들은 무관심과 외면 외에 무슨 일을 했고, 추운 겨울날 문밖에서 벌을 서다 실신하여 동사 직전에 후송된 이 어린이를 진료한 의사는 진실로 이 어린 환자를 위해 무얼 했으며, 이 어린이가 그의 유일한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학대 사실을 전해들은 그 친구의 부모는 남의 일에 말려들지 않도록 자기 아이에게 이 어린이하고 어울리지 못하도록 하기만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우리 모두가 다 가해자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피해자연하기만 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잘못은 모두 시스템의 잘못으로 치부해 버린다.

안전사고로 수십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을 때 역시 내 자식 내 부모가 잃은 것과 같다면서 이익만 추구하는 사업주를 비난함과 동시에 도대체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한 어떤 정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냐고 강하게 비판한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빈부 격차 극심해지는 등 정부의 실정(失政)에 의한 폐해가 늘어나고, 정치인의 독직행위가 만연한데다가 위헌적인 악법만 양산되는 등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정치인 때문에 국민들이 죽어날 지경이라고 불평들을 한다. 그러나 대형 안전사고 발생하지 않도록 위락시설 이용에 대한 안전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고 정부의 안전정책에 대한 감시활동을 게을리한 우리의 잘못은 없는지, 또 완벽한 선거 시스템의 미비 등을 탓하기 전에 수준 미달의 정치인을 뽑은 우리가 더 잘못한 것은 아닌지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이럴 때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왜 이렇게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는 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피해자라고 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을 때, 그것이 자기 자신의 잘못 때문은 아닌지, 또 누구나 겪기 마련이고 극복해야 하는 통과의례는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은 힘들기도 하고 귀찮다. 그냥 자기는 억울하게 피해를 봤다고 징징거리기만 하면 남들은 관심을 보인다. 가해자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는데 피해자라고 하면 대개의 경우 동정 어린 응원을 해준다. 그래서 자기가 악을 저질렀음에도 기도를 할 때에는 “주여, 저를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애절하게 간청한다. 마치 자기는 본래 착한 사람인데 주위 좋지 않은 상황이 자기를 이렇게 나쁜 짓을 하게 만들었으니 빨리 여기서 빼내어 달라고 말이다. 무슨 사건이 터졌을 때 모든 것은 제도나 시스템 탓으로 돌리는 심리상태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우리는 억울하기만 한 걸까? 여기서 나는 우리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내던지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피해자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자, 이제 우리는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껄끄러운 단어가 필요 없게 제발 피해자스럽게 행동하지는 말자. 피해자라 하더라도 너무 오랫동안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징징거리면 그것 역시 피해자 코스프레로 여겨질 수 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는 가해자가 아닌가 반성하는 자세로 임할 때 진정으로 우리는 피해자임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