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NATO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終熄)된 이후 80여 년간 미국의 군사적 보호가 당연하다는 관성에 젖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2.0 시대(이하 트럼프)가 출범하면서 그간의 관성과 지정학적 가치를 도외시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국가 우선주의(‘MAGA·America First)’가 언제라도 군사·재정적 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는 강압적인 거래 방식을 휘두름에도 ‘자강(自彊)’이 어렵다는 현실이 그들을 카오스(chaos)로 몰아넣고 있다.
러-우 전쟁은 3년이 지났지만, 끝날 기미가 없다. 트럼프의 호기로운 종전 구상이 지체되고, 2월 말의 트럼프-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하 젤렌스키) 간 회담은 파국이었다가 광물협정을 체결하는 등 조석변이(朝夕變異)가 넘쳐난다. 유럽은 ‘대서양 동맹의 종말’이라며, 강한 실망감을 분출하고, 외신들도 “국제질서의 붕괴 신호로 ‘Pax Americana’가 저무는 시기”라고들 입방아를 찢는다. 그러함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하 푸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전략적 마이웨이’를 즐기고 있다.
한편 프·영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트럼프의 오락가락 행보에도 일관되게 젤렌스키에 대한 지지·옹호를 멈추지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이견들이 잦다. △ 트럼프의 상식적이지 못한 국제질서 파괴 및 美-우크라이나 정상회담 파국에도 영향력 발휘는 어려운 데다 푸틴의 영토 팽창에 대응해야 할 현실, 독자적인 경제·안보체제 구축의 어려움 △ ‘미국이 지원하지 않는 유럽의 내일’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트럼프의 몽니에 대한 무력·좌절감도 있다. 특히 그의 갑작스러운 군사·재정 지원 중단이나, NATO와의 관계를 끝낸다 해도 이를 보강할 마땅한 대책 마련이 어렵다는 막막함 또한 깔려 있다.
지난 세월 미국과 유럽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를 함께 굴복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엔 구소련의 팽창정책을 저지 및 붕괴시켰다. 美-유럽 간 브로맨스가 형성된 결정적 계기는 1949년 3월 18일의 NATO 출범이다. 이들은 1994년부터 동진(東進) 정책을 시행하여 러시아의 공산주의 체제 확산을 저지시키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든든한 맏형 역할도 두터이 해왔다. 그러나 트럼프의 ‘힘(군사력)’과 ‘돈(경제)’에 기반한 미국 우선주의가 등장하며, ‘대서양 동맹’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미국인들은 유년 시절부터 유럽·남북아메리카 지역 등 대서양 중심의 세계지도를 보면서 성장한다. 즉, 지정학적 사고의 중심(重心)에 대서양 지역이 있으며, 세계전략 구상에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여긴다. 이러한 ‘대서양 동맹’의 가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군사 동맹이자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를 지키는 정치 동맹이다. 초기엔 美·英·프·이태리 등 12개 회원국에 불과하던 NATO는 동진 정책을 통해 점차 동유럽국가를 포함하는 30개 회원국으로 확대되었다. 최근 ‘대서양 동맹의 종말’이라는 표현의 등장은 트럼프의 일방적인 ‘MAGA·America First’에 대한 동맹·우방국의 불만이 표출된 결과다.
트럼프가 145% 관세를 부과하면서 시진핑의 무조건 굴복을 자신했지만, 이처럼 체계적으로 대응할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그가 유럽-NATO의 안보 무임승차를 이유로 대서양에서 발을 빼려는 것도 대중 공세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즉, ‘인-태 전략(新 태평양 동맹)’의 강화와 깊이 연계되어 있다. 덕분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이 된 역내 국가와 유럽은 각자도생(各自圖生)과 새로운 연합 결성으로 ‘미국의 몽니와 경제·안보 공백’을 해소하고자 노력하지만, 여의치 않다.
어쨌든 트럼프가 원하는 최종 상태는 ‘국방 잠정전략지침(Interim National Defense Strategic Guidance)’과 ‘아시아판 NATO’ 즉, ‘新 태평양 동맹’ 추진을 통해 읽어낼 수 있다. 특히 ‘태평양 동맹’의 구상은 처음이 아니다. 1949년 필리핀-대한민국(이하 한국)-대만이 주도하여 설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당시 美-유럽이 체결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은 집단안보체제가 가능했던 반면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대다수가 반식민지·신생 독립 국가였다. 이에 따라 미국이 적국(敵國=소련)과의 경쟁에 집중하려면, 아시아 국가들과는 양자 동맹 외에는 국익에 도움이 될 방안을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미국이 반대하여 ‘아시아판 NATO(Pacific Pact) 구상’은 없던 일이 되었다.
2014년 미국은 ‘제3차 상쇄전략’을 통해 견제·봉쇄대상을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바꿨다. 그리곤 ‘新 태평양 동맹’을 거론하며, 호주엔 전략 핵잠수함 기술을 전수하며, 쿼드(Quad) 안보협의체를 가동하고 있다. 중국과 남중국해에서 분쟁 중인 필리핀엔 철통같은 방위공약을 앞세우고 있다. 대만은 중국의 2027년 침공에 대비해 국방 예산을 2.5%(국내총생산·GDP 대비)에서 3%로 늘리겠다고 한다. 일본은 오커스(AUKUS)를 조커스(JAUKUS)로 바꾸고자 노력하면서 자위대 통합작전사령부 창설 및 주일미군 확장, ‘One-Theater’를 제안하는 등 각자도생에 여념이 없다.
트럼프 발(發) ‘국가 우선주의’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던 자유민주주의적 국제질서에 종언(終焉)을 가져왔다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힘(군사력)의 논리가 앞서면서 힘이 없는 국가는 ‘장기판의 졸(卒)’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13억 명의 중국이 트럼프의 강압·일방적 엄포(위협)에 굴복할 리는 만무하다. 대서양 동맹이 무너지는 작금에 러-북 군사 동맹에다 중국이 삼각 트리오로 가세한다면, 그 후과(後果)는 한반도의 위기에 더해질 것이 자명하다.
최근 트럼프의 대중(對中) 고관세·영토 팽창 욕심은 국제적 명분이 약하다. 우리의 대미(對美) 협상도 첫 단추 제시가 너무 조급했다는 국민적 염려가 존재한다. 관련 기관에서 안보·경제 대응전략을 진중하게 접근할 때다. 살아남으려면, 협상·경쟁 대상에 따라 시(時)와 때를 유연하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안보·협상 전략은 먼 내일을 내다보는 지혜와 인내, 결기가 필요하다.
김성진 국방전문 기자 btnks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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