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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을 화나게 한 춘천대첩

기사승인 26-04-1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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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5화-전쟁의 발발과 국가 존망의 위기


춘천 대첩은 낙동강 방어 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전쟁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전투다. 전쟁 초기에 잘 무장된 북한군을 국군이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크게 승리한 전투였다.

북한군은 제2군단을 투입해 춘천을 하루 만에 돌파하고, 수원으로 내려가는 국군 주력부대를 이중으로 포위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모터사이클 연대와 자주포를 춘천 일대에 배치했다. 춘천 축선에 제2사단, 홍천 축선에 제12사단을 투입하고 제5사단을 예비로 공격했다. 
 
 
한군이 사용한 모터사이클. 사진=장삼열 박사
 
 
국군은 4배나 병력이 많고, 10배나 넘는 화력을 가진 북한군에 맞서야 했다. 당시 국군 제6사단장(김종오 대령)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최대한의 전쟁 준비를 했다. 그는 춘천–화천–양구 일대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을 계속 관찰한 결과, '공격 징후'로 판단했다. 전군(全軍)의 비상은 해제되었지만, 다른 부대와 달리 장병들 휴가를 통제하고, 의심스러운 지역엔 정찰대를 보내 북한군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전쟁에 대비해 싸울 진지를 구축했고, 대피소는 곳곳에 준비해 두었다. '유비무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제16포병대대 김성 소령은 통합화력 계획을 작성해 대비했으며, 철저한 교육훈련으로 전 장병이 포술에 능숙했다. 심지어 군의관까지 포를 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제16포병대대 전승기념비. 사진=장삼열 박사
 
  
6월25일 북한군 제2사단이 소양강 길목의 모진교를 돌파하자 기세가 오른 적은 다음 날 넓은 들판인 옥산포를 가로질러 돌파하고자 했다. 대기하던 국군 제6사단은 우두산 고지 후사면에서 개활지에 있는 북한군을 향해 900발의 포탄을 쏘며 적을 일망타진했다. 26일에는 가래모기 일대에 살상지대를 운용해 북한군에 심대한 피해를 주었다. 얼마나 피해가 컸던지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기록될 정도였다.
 
 
춘천 대첩 요도. 사진=육군군사연구소
 
 
개전초 민관군 협력의 모델

북한군의 진격으로 전방에 추진된 포병 탄약이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투에 사용할 5000여발의 포탄을 군인들만의 힘으로 옮기기는 어려웠다. 이때 춘천시민들이 발 벗고 나섰다. 특히 춘천농업고등학생 100여명은 교복을 입은 채 집에서 쓰던 손수레를 가져와 포탄을 옮겼다. 춘천 시내에 있던 제사(방직)공장 여공들도 함께 힘을 보탰다. 그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장병들에게 나눠주며 응원했다. 이렇게 민관군이 함께 똘똘 뭉쳐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잘 막아냈다. 그 결과, 6월25일 당일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작전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렇게 춘천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준 덕분에 국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얻었다. 국군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미군과 유엔군은 초기 대응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적군을 향해 맨몸으로 돌진한 육탄 특공대

국군 제6사단 심일 소위는 대전차포로 북한군의 T-34 전차를 공격했다. 계속 남진하는 전차에 2차례나 공격했지만, 효과가 없자 5명의 특공대를 조직했다. 특공대는 화염병과 수류탄은 들고 길가에 매복해 있다가 전차에 올라타 포탑과 포신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전차를 파괴했다. 이를 통해 장병들의 사기가 올랐고, 북한군 전차에 대한 공포심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이 공로로 심일 소위는 태극무공훈장과 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원창·말고개에서 피어난 11명의 결단

6월28일, 국군 제6사단 2연대는 홍천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진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차를 막을 충분한 장비가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대전차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조달진 일병을 비롯한 11명의 특공대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속에서 2명씩 조를 짜서 시체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굉음을 내며 북한군 전차가 다가오자, 수류탄을 들고 돌진했다. 전차 위로, 포탑 위로, 그리고 궤도 사이로 정확하게 꽂혔다. 연쇄 폭발이 이어졌고, 불길과 연기가 치솟았다. 기습을 당한 적은 혼란에 빠졌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병 화력과 근접전으로 적을 제압하고, 적 전차 7대를 파괴하며, 40여 명의 적을 사살했다. 당시 용감한 국군장병들이 말고개에서 공격한 전차는 뒤에 확인한 결과 SU-76 자주포였다고 한다. 
 
 
육탄 11용사 전적비. 사진=육군군사연구소
 
 
춘천과 홍천 일대에서 국군은 368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했다. 반면 북한군은 무려 6700여명이 사망했고, 122명이 포로로 잡혔다. 자주포 25대와 전투 장비까지 파괴되면서 북한군 전력에 손실이 컸다. 이는 단순한 전투 승리가 아니라 전쟁 전체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였다.

국군 제6사단이 적군의 진격을 막아준 덕분에 한강 북쪽에 있던 국군은 한강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북한군 제2군단 주력은 3일 동안 춘천을 돌파하지 못해 수원 일대에서 2중으로 국군을 포위 섬멸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화가 난 김일성은 제2군단장(김광협)과 예하 2사단장(이청송), 12사단장(전우)을 보직해임 했다. 김일성은 전쟁 실패의 원인으로 '춘천 전투 3일'을 이야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삼열 박사는 한미연합사령부·국방부·육군 등에서 대미(對美) 정책업무와 전쟁사를 담당했다. 전쟁사, 한미동맹, 국제 평화활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국방연구원(KIDA),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육군 군사연구소 등을 거쳤다. 저서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제2보병사단사>, <현리·한계 전투(共著)>, <한미동맹 60년사(共著)> 등이 있다. 화랑무공훈장, 美 동성무공훈장(BSM) 등을 수상했다.

장삼열 박사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

<저작권자 경제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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